어휘, 표현

‘넘겨짚다, 지레 짐작하다, 속단하다’ 영어로?

새로운 미래 2024. 2. 27.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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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 등에 입각해 정확히 아는 것이 아니라, 겉 모습만 보고 대충 짐작으로 판단하다'는 뜻을 가진 우리말에 '넘겨짚다' 혹은  "지레 짐작하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넘겨 짚는' 능력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을 지니고 사는 것 같습니다. '넘겨짚지 마라' 혹은 '지제 짐작해서는 안된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필자의 생각엔 이 '넘겨 짚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신비로운 사고 능력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보면 바로 아는 직관(intuition) 및 상상력(imagination)을 근간으로 발휘되는 사고 능력이라고 말입니다.

가령 초기 인류가 깊은 산중에서 곰을 생전 처음 만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일 그에게 넘겨 짚는 능력이 없어서, 무엇이든 근거를 통해 정확히 알려는 사고방식에만 매달려야만 했다면, 그가 과연 살아 남아서 종족을 보존할 수 있었을까요? 또한 현대 문명의 기초가 된 과학적 연구 방식이란 것도 관찰을 통해 목격한 특이한 현상 뒤에 어떤 배후 원리가 있을 거라 넘겨 짚어 본 후, 그 짐작이 맞았는지 사후적으로 근거를 수집해 이를 추론하고, 증명해 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잖습니까?

따라서 넘겨짚는 능력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어떤 행위가 뒤따르느냐, 즉, 이 능력을 얼마나 유익하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겠죠. 넘겨 짚는 능력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된 것은 이를 올바로 사용하는 경우보다는 섣부르게 혹은 어설프게 이용해서 상황을 악화시키는 경우를 더 많이 봐와서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영어에도 의미상 이에 상응하는 중요 동사가 하나 있습니다.

 

assume:

accept something as true without question or proof

 

보시면 아시겠지만, '넘겨짚다'는 우리말과 놀라울 정도로 의미가 흡사합니다.

이 동사의 명사형인 assumption은 '지레 짐작하는 행위 또는 그 내용'을 의미합니다.

 


아마존 프라임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잭리쳐(Reacher)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군 특수수사대 지휘관 출신인 그는 은퇴해서 연금에 기대 살며 전국을 유랑하다가 복잡한 범죄 사건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의 월등한 피지컬과 빼어난 수사 능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데요. 그가 사건을 수사할 때, 늘 모토로 삼는 말이 있습니다.

In investigation, assumptions kill.

수사를 할 때 넘겨짚는 건 절대 금물이다.

 

하지만 재밌는 점은 그가 사건 해결에 필요한 중요한 단서를 얻게 될 때마다, 넘겨 짚는 능력을 어김없이 발휘한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시즌 2의 도입부에서 현금 지급기에서 돈을 빼내고 있는 여성의 얼굴에 상처가 있고 가까운 곳에 그녀의 것으로 보이는 차에 험상궂은 남자가 타고 있는 것만을 보고, 그 여성이 자동차 강도를 당하는 중 아닐까 하고 넘겨 짚습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자신이 짐작한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한 후 곧장 강도를 떄려 눞히고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구해 줍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수도 없이 반복됩니다.

 

 

또한 재미있는 점은 그가 넘겨 짚는 내용이 항상 옳다고 입증되는 것은 아닙니다. 옛동료들을 모아 한참 수사에 열중하던 중 리쳐는 수상한 남자가 승용차로 자신들을 미행하고 있음을 직감합니다. 이 사내가 자신이 쫓는 범죄 조직의 일원일 것이라 넘겨짚은 리쳐가 자동차를 부수고 사내를 때려 눞혔는데, 동료가 쓰러진 사내에게서 뉴욕경찰(NYPD) 신분증을 찾아 냅니다. 하지만 리쳐는 이 경찰이 범죄조직과 한패인 나쁜 경찰이라 넘겨짚고는 그를 의심하는데, 드라마 끝부분에 이르면, 그 역시 범죄조직을 소탕하려는 좋은 경찰이란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리쳐가 이 경관을 오해하게 된 사태는 그가 신중히 판단해야 할 일을 너무 성급히 판단해 버린 결과입니다. 따라서 리쳐가 이 경관이 갱단원일 거라 넘겨짚은 행위나 혹은 나쁜 경찰이라 지레 짐작한 일은 지나친 속단(速斷)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assume(assumption)'은 '속단하다'라는 우리말 의미와 상응하는 영어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의학드라마 하우스(HOUSE MD)의 주인공인 세게적으로 명성이 나 있는 진단전문의 (Diagnostician)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불의의 의료 사고로 한쪽 다리 근육이 모두 괴사해 버린 후부터, 다리를 절며,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채 살아 가게 됩니다. 자신을 치료했던 의사의 바보짓으로 평생 불구자로 살게 된 하우스 박사의 성격은 갈수록 냉소적이고 괴팍해져만 갑니다.

하우스의 도입부에서 하우스 박사는 다음과 같이 처음 등장하게 됩니다.

House: See that? They all assume I’m a patient because of this cane.

하우스: 저거 보이냐? 저들은 모두 이 지팡이만 보고 내가 환자일 거라 넘겨짚지.
Wilson: So put on a white coat like the rest of us.

윌슨: 그러니까 우리들처럼 흰 가운을 입으시라고요.
House: I don’t want them to think I’m a doctor. People don't want a sick doctor.

하우스: 사람들이 날 의사라고 생각하길 바라지 않아. 아픈 의사를 달가워할 사람은 없으니까.

 

병원 복도에서 지팡이를 짚으며 다리를 절고 지나가는 자신을 바라보며 하우스 박사가 넘겨짚으며 하는 말, 그 첫마디만 봐도 의의 성격이 얼마나 꼬여있을지 미루어 짐작이 됩니다. 만일 제가 윌슨박사였다면 이렇게 소리쳤을 겁니다."거 개뼉다구 닽은 소리 좀 그만 하세요. 저 사람들은 자기들 병때문에 박사님이 지나가는 줄도 모를 겁니다."

 

"아픈 의사를 달가워할 사람은 없다"는 말도 인간 전체를 놓고 하우스 박사가 내린 성급한 속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다른 드라마만 봐도, 중병에 걸린 의사라 할지라도 실력만 좋다면, 그에게 수술을 받기를 간절히 희망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다른 한편으로는 애꿎은 사람들을 향해 그런 억지성 속단을 서슴없이 내리는 모습을 곰곰이 지켜보자면, 하우스 박사 마음 속에 '자신을 향해 불구의 몸을 선사한 세상을 향한 원망의 마음이 아주 똘똘 뭉쳐있구나'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문득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이 지레 짐작하거나, 넘겨 짚으며 하는 말은, 정성을 다해 귀담아 듣게 되면, 그 사람의 마음 속 비밀을 풀어낼 수 있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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